[인문학의 뜰] 2023년, 처음 하고 싶은 일들

미실란
2023-02-24
조회수 245

 


섬진강들녘서 세번째 해 맞아 550리 흐르는 강길 걷고 싶고 주변 새들의 삶 기록하고 싶고 키운 채소로 요리 해보고 싶다 내 평생 즐기며 헤맬 숲이기에




섬진강 들녘에서 세번째 해를 맞는다. 첫해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다음해에는 보완하며 실패를 줄이고자 노력했다면, 올해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세가지 일을 해보고 싶다.

해가 바뀌기 때문에 먹는 마음일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눈 내린 들녘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 후 떠오른 생각들이다. 저 들녘이 길눈에 덮였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흰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멧비둘기들이 시린 발을 뻗어 논에 내리는 까닭은 낙곡(落穀)이 눈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처음 해보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는 것은 결핍과 간절함이 자라난 탓이다. 숫눈 위에선 첫걸음으로 보일 테지만 눈이 녹고 나면 주저하고 서툰 발자국들이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지 않을까.


우선 섬진강이 발원하는 전라북도 진안군 데미샘에서 전라남도 광양시 망덕포구까지 걷고 싶다. 섬진강을 끼고 산다며 여러번 자랑했지만 아직 걸어본 곳은 남원·곡성·구례·하동 정도다. 굽이굽이 흐르는 550리 강길을 내 발로 걸으며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품고 싶다.

둘째는 강과 골짜기와 들녘을 오가는 새들의 삶을 알고 싶다. 집필실 앞마당 플라타너스 둥지를 들락날락하는 까치들이 눈에 자꾸 밟혀 망원경을 사두긴 했다. 참새와 까마귀와 멧비둘기는 흔히 보았고, 솔부엉이와 후투티도 가끔 망원경에 잡혔다. 5월 논에 강물을 끌어들일 때는 백로와 왜가리가 보초를 서듯 들녘 곳곳을 지켰다. 어림짐작으로 아는 새보다 훨씬 많은 새들을 이름도 모른 채 지나왔다.

집필실과 숙소를 출퇴근하며 새들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정기적으로 새를 찾아 강과 골짜기와 들녘으로 갈까 한다. 오래 머물며 그 울음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모양을 눈 크게 뜨고 보려는 것이다. 발자국이나 깃털이나 배설물을 사진으로 모으는 작업도 함께 할 예정이다. 집필실로 돌아와선 새에 관한 도감을 펼치곤 내가 보고 들은 새가 무엇인지 확인한 후 기록하겠다.

셋째는 텃밭에서 나는 제철 채소들로 간단하게나마 요리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진 상추샐러드나 파전과 배추전 그리고 각종 채소구이 정도가 전부였다. 이런저런 요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요리책과 동영상들도 찾아봤지만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쌓인 눈 아래에서 겨울을 이기는 월동 작물만도 열가지가 넘으니, 우선 이것들로 가능한 요리부터 시작할까 한다. 보리된장국, 시금치나물과 유채나물, 봄동겉절이나 파김치를 겨울과 봄에 차례차례 만들어보고 싶다.

새해 처음 해보려는 세가지 일은 섬진강 들녘에서의 삶과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두해를 보내지 않았다면 품지 않을 바람들이다. 그 일들을 일년 안에 만족할 만큼 이룰 수 있을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테지만, 실수하고 실패하며 내 한계와 약점을 깨닫는 날들이 될 것이다.

강을 걷는 것도 새를 아는 것도 요리를 익히는 것도 일년에 완료할 일들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들은 내가 평생 즐기며 헤맬 숲으로 통하는 세가지 문이다. 문 앞에선 문만 보이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하고 거칠면서도 안온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2023년 새해에도 섬진강 들녘에서 하루하루를 쌓는 삶의 원칙은 바뀐 것이 없다. 내 발바닥으로 내 눈과 귀로 내 손과 혀로, 만나고 배우고 익히며 알아나갈 것! 고서들을 장작 삼아 역사소설이란 불을 피워왔고, 생태 책들을 골라 책방까지 열었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책에서 우선 진리를 찾던 고약한 버릇을 고칠까 싶다.

김탁환 (소설가)


<출처>


1 0
카카오톡 채널 채팅하기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