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을 상상한다
눈길 한번 주지않던 곳에 머위·민들레 스스로 자라 4월의 식탁 풍성하게 하네 밭이라 여기지 않았던 곳 이젠 허리 숙여 살펴본다 자연이 심고 가꾼 밭이니
지난해까지는 텃밭에 물 줄 날만 달력에 표시했는데, 올해부터는 풀 뽑을 날도 함께 적어둔다. 지난가을 제 키보다 높이 자란 풀에 덮여 쪽파들이 녹아버린 탓이다. 물만 열심히 주고 풀 뽑을 때를 건너뛰면, 풀들이 작물보다 빨리 자라 뿌리를 휘감고 잎을 가린다.
물을 주지 않는 날 더 오래 텃밭에 머문다. 싹이 난 감자와 자리를 잡은 어린 상추 주위로 올라오는 풀들을 호미로 걷어낸다. 열다섯개 이랑을 한번씩만 살펴도 두세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월동작물을 수확하고 트랙터로 흙을 세번 갈아엎었기 때문에 아직은 텃밭에서 거둘 작물이 없다. 상추는 보름쯤 뒤부터 샐러드로 조금씩 딸 만하고, 감자는 하지에나 수확할 예정이다.
장에 가서 어떤 채소로 반찬을 만들까 궁리하는 내게 농사 스승이 텃밭 옆 감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위밭이군.”
마을 고양이들이 종종 머물며 대소변도 보는 자리에 난 풀들이 머위였던 것이다. 오가는 고양이들이 늘어난 만큼 머위잎도 풍성했다. 그날부터 매일 머위를 딴 후 살짝 데쳐 쌈으로도 먹고 나물로도 무쳐 먹었다.
고양이들이 즐기는 또 다른 곳은 텃밭으로 향하는 마당이다. 그곳은 햇볕이 잘 들어 고양이들이 해바라기하며 번갈아 존다. 낮게 깔려 자란 풀들 대부분이 민들레여서, 봄부터 노란 꽃들이 수백송이나 앞다투어 피었다. 새벽에 한시간 남짓 텃밭에 물을 준 후 차 한잔을 곁들여 앉으면, 밤사이 닫았던 꽃잎이 열리면서 노란 꽃들이 마술처럼 피어났다. 꽃들을 저만치 두고 오래 보니 참 좋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아침 농사 스승이 이 마당을 보며 말했다.
“민들레밭이군.”
민들레는 뿌리부터 꽃까지 버릴 것이 없다며 장아찌든 초절임이든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호미를 들고 텃밭에 작물을 심거나 풀을 뽑는 대신 민들레를 캤다. 뿌리 길이가 상추나 시금치 정도겠거니 예상했는데, 흙을 파도 파도 뿌리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부드러운 잎이나 작고 맑은 꽃과는 다른 끈질김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섞인 흰민들레로는 차를 만들기로 했다. 노란 꽃이 피는 민들레보다 약성(藥性)이 강하다고 했다. 뿌리부터 잎과 줄기와 꽃대와 꽃까지 모두 거둬 깨끗이 씻은 후 대나무 채반에 널었다. 물기가 빠진 뒤엔 약한 불에 덖은 후 틈날 때마다 끓여 마시려 한다.
머위와 민들레를 캐고 반찬을 만들어 먹으니 4월의 식탁이 풍성했다. 흙만 뒤집고 싹만 바라보는 달이라 여겼는데, 먹거리는 뜻밖에도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봄나물로 먹는 들풀들 역시 텃밭 가까이에서 자란다. 쑥이 그렇고 돌나물이 그렇고 쑥부쟁이가 그렇다.
민들레가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을 피울 때까지 내가 도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밭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눈길 던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풀들이 텃밭으로 넘어오기라도 했다면 낫을 들고 전부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밭이고 여기서부턴 밭이 아니라는 구분에는, 여기까지는 먹을 수 있고 여기서부턴 먹을 수 없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다. 관리되는 안전한 것과 관리되지 않는 위험한 것의 대비를 당연시하는 습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봄 들판과 골짜기에는 자연이 스스로 만든 밭이 그득하다.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고서도 그들 스스로 피고 지고를 수십번 반복한 결과다.
내가 밭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바깥에서 다채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머위와 민들레뿐일까. 이제는 풀을 뽑거나 물을 주러 텃밭에 갈 때마다 밭의 바깥에도 눈을 준다. 일부러 다가가선 허리를 숙이곤 풀과 꽃들을 살피기도 한다. 사람이 만든 밭까지 품는 자연의 밭을 상상한다.
김탁환 소설가
원문 : https://www.nongmin.com/article/20230419500393
밭을 상상한다
눈길 한번 주지않던 곳에 머위·민들레 스스로 자라 4월의 식탁 풍성하게 하네 밭이라 여기지 않았던 곳 이젠 허리 숙여 살펴본다 자연이 심고 가꾼 밭이니
지난해까지는 텃밭에 물 줄 날만 달력에 표시했는데, 올해부터는 풀 뽑을 날도 함께 적어둔다. 지난가을 제 키보다 높이 자란 풀에 덮여 쪽파들이 녹아버린 탓이다. 물만 열심히 주고 풀 뽑을 때를 건너뛰면, 풀들이 작물보다 빨리 자라 뿌리를 휘감고 잎을 가린다.
물을 주지 않는 날 더 오래 텃밭에 머문다. 싹이 난 감자와 자리를 잡은 어린 상추 주위로 올라오는 풀들을 호미로 걷어낸다. 열다섯개 이랑을 한번씩만 살펴도 두세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월동작물을 수확하고 트랙터로 흙을 세번 갈아엎었기 때문에 아직은 텃밭에서 거둘 작물이 없다. 상추는 보름쯤 뒤부터 샐러드로 조금씩 딸 만하고, 감자는 하지에나 수확할 예정이다.
장에 가서 어떤 채소로 반찬을 만들까 궁리하는 내게 농사 스승이 텃밭 옆 감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위밭이군.”
마을 고양이들이 종종 머물며 대소변도 보는 자리에 난 풀들이 머위였던 것이다. 오가는 고양이들이 늘어난 만큼 머위잎도 풍성했다. 그날부터 매일 머위를 딴 후 살짝 데쳐 쌈으로도 먹고 나물로도 무쳐 먹었다.
고양이들이 즐기는 또 다른 곳은 텃밭으로 향하는 마당이다. 그곳은 햇볕이 잘 들어 고양이들이 해바라기하며 번갈아 존다. 낮게 깔려 자란 풀들 대부분이 민들레여서, 봄부터 노란 꽃들이 수백송이나 앞다투어 피었다. 새벽에 한시간 남짓 텃밭에 물을 준 후 차 한잔을 곁들여 앉으면, 밤사이 닫았던 꽃잎이 열리면서 노란 꽃들이 마술처럼 피어났다. 꽃들을 저만치 두고 오래 보니 참 좋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아침 농사 스승이 이 마당을 보며 말했다.
“민들레밭이군.”
민들레는 뿌리부터 꽃까지 버릴 것이 없다며 장아찌든 초절임이든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호미를 들고 텃밭에 작물을 심거나 풀을 뽑는 대신 민들레를 캤다. 뿌리 길이가 상추나 시금치 정도겠거니 예상했는데, 흙을 파도 파도 뿌리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부드러운 잎이나 작고 맑은 꽃과는 다른 끈질김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섞인 흰민들레로는 차를 만들기로 했다. 노란 꽃이 피는 민들레보다 약성(藥性)이 강하다고 했다. 뿌리부터 잎과 줄기와 꽃대와 꽃까지 모두 거둬 깨끗이 씻은 후 대나무 채반에 널었다. 물기가 빠진 뒤엔 약한 불에 덖은 후 틈날 때마다 끓여 마시려 한다.
머위와 민들레를 캐고 반찬을 만들어 먹으니 4월의 식탁이 풍성했다. 흙만 뒤집고 싹만 바라보는 달이라 여겼는데, 먹거리는 뜻밖에도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봄나물로 먹는 들풀들 역시 텃밭 가까이에서 자란다. 쑥이 그렇고 돌나물이 그렇고 쑥부쟁이가 그렇다.
민들레가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을 피울 때까지 내가 도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밭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눈길 던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풀들이 텃밭으로 넘어오기라도 했다면 낫을 들고 전부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밭이고 여기서부턴 밭이 아니라는 구분에는, 여기까지는 먹을 수 있고 여기서부턴 먹을 수 없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다. 관리되는 안전한 것과 관리되지 않는 위험한 것의 대비를 당연시하는 습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봄 들판과 골짜기에는 자연이 스스로 만든 밭이 그득하다.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고서도 그들 스스로 피고 지고를 수십번 반복한 결과다.
내가 밭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바깥에서 다채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머위와 민들레뿐일까. 이제는 풀을 뽑거나 물을 주러 텃밭에 갈 때마다 밭의 바깥에도 눈을 준다. 일부러 다가가선 허리를 숙이곤 풀과 꽃들을 살피기도 한다. 사람이 만든 밭까지 품는 자연의 밭을 상상한다.
김탁환 소설가
원문 : https://www.nongmin.com/article/20230419500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