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 안전하면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해도 되는 것일까. 핵발전소 근처에 살았기에 피폭된 육지 동식물처럼, 1㎞ 해저터널을 통과한 뒤 방류할 오염수와 맞닥뜨릴 바다 동식물들 역시 방사성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어류는 단지 식단에 오르는 ‘물고기’가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누리는 수중 동물인 ‘물살이’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에 반대하는 국제 연맹 단체 관계자들이 오염수 해양 투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김탁환 | 소설가
글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곁으로 가고자 애쓰라고 답한다. 내 문장으로 담고 싶은 인간의 곁, 시간의 곁, 공간의 곁으로 가서 함께 머물며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 다음 쓰라는 것이다.
곁으로 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연락해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과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원하는 시간의 곁으로 가는 것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때나 이미 지나가 버린 어느 때를 파악하려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원하는 장소로 가는 것 역시 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하고 적지 않은 경비가 든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아직 많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는 다양한 민물 어류가 등장한다. 들짐승이나 날짐승 그리고 풀과 나무들은 호수 주변을 오가며 만나고 다가갈 수도 있지만, 어류의 종류와 습성까지 어떻게 알았을까. 강꼬치고기는 월든 호수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소로는 강꼬치고기 곁으로 가기 위해 한겨울에도 얼음판에 엎드려 물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모양과 빛깔이 다른 강꼬치고기를 세 종류나 동시에 발견하고 차이를 기록한 날도 있었다.
언제든 곁으로 갈 수 있던 곳이 통제되기도 한다. 신나미 교스케가 쓴 <소와 흙>은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뒤 ‘귀환곤란 구역’과 ‘거주제한 구역’으로 설정된 지역의 소들을 다룬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안전하지 않은 그곳에 동식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동식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11년 5월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현 지사에게 핵발전소 반경 20㎞ 안에 생존하는 가축은 소유자 동의를 얻어 안락사시키라고 지시했다. 많은 소가 지시에 따라 죽임을 당했지만, 가축 소유자가 동의하지 않은 소들은 살아남았다. 그 소들을 돌보려면 사람들이 다시 곁으로 가야 한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풀이 나고 방목장의 소들은 그 풀을 먹는다. 교배하고 송아지를 낳는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선 소만 집중해서 조망했지만, 많은 동식물이 방사능에 피폭된 채 위험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티끌만 한 잘못도 없지만, 방사능 때문에 두고두고 고통받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숫자를 들이밀며 사람에겐 안전하다는 주장을 거듭한다. 그 주장이 타당한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 사람만 안전하면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해도 되는 것일까. 핵발전소 근처에 살았기에 피폭된 육지 동식물처럼, 1㎞ 해저터널을 통과한 뒤 방류할 오염수와 맞닥뜨릴 바다 동식물들 역시 방사성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어류는 단지 식단에 오르는 ‘물고기’가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누리는 수중 동물인 ‘물살이’다. 오염수가 후쿠시마현 앞바다의 해양생태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알기 위해선, 방사성물질이 물살이에게 미치는 영향부터 철저하게 따져봐야 한다. 기존에 마련된 법적 기준치는 인간의 안전성만을 고려한 것이지, 바다 동식물의 안전성까지 살핀 것은 아니다. 사람이 먹어도 괜찮다는 것과 물살이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다는 움직인다. 소나 돼지나 닭과 같은 가축이라면 구역을 정해 벽을 쌓아 이동을 막을 수 있지만, 바다에선 수중에 경계를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바다의 광활함이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광활하다는 핑계로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들이 만든 섬의 크기와 무게를 우리는 또한 안다. 오염수가 방류될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부터 출발한 물살이들이 지구 전체를 돌고 돌고 또 돌 것이다. 먹고 먹히고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오염수가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에게 익숙한 곳까지만 가선 안전성을 담보했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 사람이 없더라도,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물들이 있는 곳까지, 곁으로 더 가까이 가서 살펴야 한다. 거기 오염수가 쏟아져 나올 수중에도 숨 쉬며 헤엄치는 물살이가 있다. 그 곁에서 당신은 어떤 문장을 쓸 것인가. 인류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방사성물질이 든 후쿠시마현의 오염수를 지금부터 30년 가까이 내뿜으려 한다. 상상하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없이.
원문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96794.html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에 반대하는 국제 연맹 단체 관계자들이 오염수 해양 투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김탁환 | 소설가
글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곁으로 가고자 애쓰라고 답한다. 내 문장으로 담고 싶은 인간의 곁, 시간의 곁, 공간의 곁으로 가서 함께 머물며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 다음 쓰라는 것이다.
곁으로 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연락해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과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원하는 시간의 곁으로 가는 것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때나 이미 지나가 버린 어느 때를 파악하려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원하는 장소로 가는 것 역시 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하고 적지 않은 경비가 든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아직 많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는 다양한 민물 어류가 등장한다. 들짐승이나 날짐승 그리고 풀과 나무들은 호수 주변을 오가며 만나고 다가갈 수도 있지만, 어류의 종류와 습성까지 어떻게 알았을까. 강꼬치고기는 월든 호수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소로는 강꼬치고기 곁으로 가기 위해 한겨울에도 얼음판에 엎드려 물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모양과 빛깔이 다른 강꼬치고기를 세 종류나 동시에 발견하고 차이를 기록한 날도 있었다.
언제든 곁으로 갈 수 있던 곳이 통제되기도 한다. 신나미 교스케가 쓴 <소와 흙>은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뒤 ‘귀환곤란 구역’과 ‘거주제한 구역’으로 설정된 지역의 소들을 다룬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안전하지 않은 그곳에 동식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동식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11년 5월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현 지사에게 핵발전소 반경 20㎞ 안에 생존하는 가축은 소유자 동의를 얻어 안락사시키라고 지시했다. 많은 소가 지시에 따라 죽임을 당했지만, 가축 소유자가 동의하지 않은 소들은 살아남았다. 그 소들을 돌보려면 사람들이 다시 곁으로 가야 한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풀이 나고 방목장의 소들은 그 풀을 먹는다. 교배하고 송아지를 낳는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선 소만 집중해서 조망했지만, 많은 동식물이 방사능에 피폭된 채 위험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티끌만 한 잘못도 없지만, 방사능 때문에 두고두고 고통받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숫자를 들이밀며 사람에겐 안전하다는 주장을 거듭한다. 그 주장이 타당한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 사람만 안전하면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해도 되는 것일까. 핵발전소 근처에 살았기에 피폭된 육지 동식물처럼, 1㎞ 해저터널을 통과한 뒤 방류할 오염수와 맞닥뜨릴 바다 동식물들 역시 방사성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어류는 단지 식단에 오르는 ‘물고기’가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누리는 수중 동물인 ‘물살이’다. 오염수가 후쿠시마현 앞바다의 해양생태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알기 위해선, 방사성물질이 물살이에게 미치는 영향부터 철저하게 따져봐야 한다. 기존에 마련된 법적 기준치는 인간의 안전성만을 고려한 것이지, 바다 동식물의 안전성까지 살핀 것은 아니다. 사람이 먹어도 괜찮다는 것과 물살이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다는 움직인다. 소나 돼지나 닭과 같은 가축이라면 구역을 정해 벽을 쌓아 이동을 막을 수 있지만, 바다에선 수중에 경계를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바다의 광활함이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광활하다는 핑계로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들이 만든 섬의 크기와 무게를 우리는 또한 안다. 오염수가 방류될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부터 출발한 물살이들이 지구 전체를 돌고 돌고 또 돌 것이다. 먹고 먹히고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오염수가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에게 익숙한 곳까지만 가선 안전성을 담보했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 사람이 없더라도,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물들이 있는 곳까지, 곁으로 더 가까이 가서 살펴야 한다. 거기 오염수가 쏟아져 나올 수중에도 숨 쉬며 헤엄치는 물살이가 있다. 그 곁에서 당신은 어떤 문장을 쓸 것인가. 인류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방사성물질이 든 후쿠시마현의 오염수를 지금부터 30년 가까이 내뿜으려 한다. 상상하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없이.
원문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96794.html